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보통 4-5개의 국어에 능통한 사람을 보고도 천재라고 극찬을 한다.
그런데 한사람이 7개국어를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바로 조선조에 영의정을 지낸 범옹 신숙주가 주인공이다.
정치적인 얘기는 접어두고 학자적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였으며 한국최초의 일본 관련책 해동제국기를 저술하는등 어문학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는 특히 설총의 이두문자는 물론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등에 능통했으며 인도어, 아라비아어까지도 터득했다고 한다.
명문가답게 일제하 독립투쟁의 주역들인 단재 신채호, 신규식 선생 등이 그의 후손들이다
76세에 처음 장가들고 99세까지 장수한 홍유손
조선시대 하면 사내아이는 보통 10세를 넘으면 장가를 가게 되는데, 무려 76세의 죽을 나이에 첫 장가를 가고 아이를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장본인은 홍유손. 그는 소위 죽림칠현으로 속세를 떠난 청담파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76세에 장가를 들어 아들 지성을 낳고 99세까지 살다간 조선시대 기인중의 한명이다.
같은 죽림칠현이자 생육신이었던 남효온은 그를 평해 [글은 칠원같고 시는 산곡을 누빈다]고 하였다.
그는 거의 기인에 가까웠으며 특히 세조가 정권을 잡은 후 김시습, 남효온등과 어울리면서 세상을 비관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 풍자적인 인생을 살았다.
99세의 천수를 누린 그는 역사 인물사전에 나오는 최장수 인물이 되고 있다.
왕의 얼굴한번 보지도 않고 정승에 오른 윤 증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다.
우암 송시열의 제자로 당쟁의 한축이었으며 재야의 막후실력자 소론의 영수였다.
윤증은 왕의 얼굴한번 보지 않고 우의정 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역사상 단 한명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는데 그가 받았던 관직을 보면 36세때 내시교관부터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호조참의, 대사헌, 우찬성, 좌찬성, 83세때 판돈녕부사까지 계속 관작이 승진되면서 제수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어쨌든 그는 출사하지도 않은 체 재야에서 일정한 세력을 등에 업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한 번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왕의 얼굴도 보지 않으며 정승이 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아홉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한 한국사의 천재 이율곡
한국의 역사상 현인의 경지에 근접한 인물을 꼽으라면 관점의 차이는 있겠지만 율곡 이이 선생을 꼽는데 누구도 주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율곡 선생은 9번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 한 인물이다.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며 또한 예언자적 능력도 뛰어나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고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며 정치, 경제, 국방 등 모든 분야에 식견이 탁월한 정치가요, 사상가이며 교육자였으며, 철학자였다.
그의 가문은 또 유명한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둔 뿌리 깊은 천재가문의 집안이었으며 한국판 제갈공명, 한국정신사의 큰 산맥, 성리학의 대가,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러나 천재는 단명이라고 했던가, 그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