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식량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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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렵채집민에서 최초의 문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대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구조는 식량의 생산과 분배 체계에 근거하고 있었다. 농업 식량 생산에서의 잉여분과 공동 식량 저장, 그리고 관개시설의 발달은 정치적 집중화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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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8500년 경 근동에서, 기원전 7500년경에는 중국에서, 기원전 3500년경에는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서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 농사의 기술은 이 세 군데 주요 출발 지점에서 전 세계로 퍼져 인류의 주된 식량 생산 수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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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물을) 좀 더 편리하고 풍부한 식료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바람직한 돌연변이를 확산시킨 인간의 선택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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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이 식량 조달이란 목적을 위해 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에서도 이와 똑같은 교환이 이루어졌다.
  • 그 시작은 기원전 8000년경에 근동에서 양과 염소를 길들인 것이었으며, 곧이어 소와 돼지도 길들였다(돼지는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도 길들여졌고, 닭은 기원전 6000년경에 동남아시아에서 길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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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 문명이 곡물에 진 이러한 빚은 여러 신화와 전설에 반영되어 있다. 이 세계의 창조는, 그리고 오랜 야만의 시기 직후에 이루어진 문명의 대두는 모두 중요한 농작물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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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날 우리는 사냥과 채집의 포기, 동물과 식물의 길들이기, 농사에 근거한 정착 생활방식이 인류를 현대 세계로 가는 도상에 올려놓았다고 말하며, 최초의 농민이야말로 최초의 현대적이고, ‘문명화된'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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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째서 사람들은 수렵과 채집에서 농사로 전환하게 되었을까?
  • 이것이 수수께끼인 까닭은, 이 전환 때문에 인간은 영양학적 면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여러 면에서도 상당히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인류학자는 농사의 채택을 가리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일컫기도 했다.
  • 농사에 비하면 수렵채집이 훨씬 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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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사를 통해 똑같은 양의 식량을 생산하는 것보다 시간이 더 적게 든다는 뜻이다.
  • 농업 이전 시기에만 해도 수렵채집민의 생활환경은 지금처럼 변경이 아니었을 것이고, 따라서 이들 생활 방식은 아마 훨씬 더 유쾌했을 것이다. 한때는 농사로 전환한 덕분에 인간이 예술을 추구하고 새로운 기예와 기술 등을 개발할 시간을 더 많이 얻게 되었다고 여겼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농사는 수렵채집민이 처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불안한 존재로부터의 해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농사가 더 생산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토지 면적당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한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 노동 시간당 식량 생산량으로 계산하면, 수렵채집보다 농사 쪽이 덜 생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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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대로 농사 덕분에 사람들이 영양실조나 굶주림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면, 그런 노력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
  • 하지만 최초의 농민보다는 오히려 수렵채집만이 더 건강했을지도 모른다.
  • 곡물은 칼로리를 확실하게 제공해주었지만, 필수 영양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는 못했다.
  • 따라서 농민은 수렵채집민보다 키가 더 작았다.
  • 인류가 고대 수렵채집민 정도의 신장을 회복한 것은 겨우 현대에 들어서였으며, 그마저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에서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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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뼈에 대한 연구에서 나온 여러 가지 증거에 따르면, 농민은 영양실조에서 비롯된 각종 질환을 앓았다. 그런데 이런 질환은 수렵채집민에게서 거의 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 여성의 골격에서는 관절염을 비롯해 발가락과 무릎과 척추 아래쪽에 기형이…
  • 치아 유해에 따르면 농민은 충치로 고생했는데, 곡물 위주의 식단에 들어있는 탄수화물이 입안에서 씹히면서 침과 뒤섞이는 과정에서 당분으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 농사 집단이 정착하고 그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영양실조와 기생충 질환과 전염성 질환의 발생률이 더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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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은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수렵채집에서 농사로의 전환은 인류 역사라는 커다란 틀에서 보면 매우 신속한 전환이었지만, 농민 각각의 시점에서는 점진적 전환이었다. 야생 농작물에서 길들인 농작물로의 변화가 일종의 스펙트럼을 이루듯이, 순수한 수렵채집민에서 전적으로 농사에 의존하는 사람들로의 변화 역시 일종의 스펙트럼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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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사의 채택은 사람들이 순수한 수렵채집민에서 농사를 통한 식량에 더 많이 의지하는, 그리고 결국 전적으로 의존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과정엣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기후의 변화로 보인다. 빙하기에 대해 알아볼 것
  • 기원전 1만 8000년에서 기원전 9500년 사이의 기후는 춥고 건조하며 매우 변화무쌍했다. 따라서 이 기간에는 그 어떤 경작이나 길들이기 시도도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시도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에 대해서는 증거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 장소는 시리아 북부의 아부후레이라라는 유적지다. 기원전 1만 700년경 이곳의 거주민은 호밀을 길들이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갑작스러운 한랭이(신 드리아스기라고 하며, 기원전 1만 700년경에 시작되어 1200년가량 지속되었다)가 찾아오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다 기원전 9500년경에 이르러 기후가 갑자기 더 따뜻하고 습하며 안정적으로 변했다. 그 덕분에 농사에 필요한 기후 조건이 갖춰지기는 했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 이처럼 새로이 안정을 찾은 기후가 농사 채택을 촉진한 유일한 요인이었다면, 세계 곳곳에서 동시적으로 농사가 지어졌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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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정주가 이전보다 증가한 것이었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수렵채집민이 이전보다 덜 이동하고, 한해 동안에 한 야영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심지어 영구 정착지를 만드는 일이 생겨났다. 농사 채택보다 앞서서 정주한 마을 공동체의 사례는 매우 많다.
  • 근동의 나투프 문화
  • 그런 정주를 가능하게 했던 요인이 있었으니, 바로 그 지역에만 풍부한 야생 식량(특히 물고기나 조개)이었다.
  • 보통 수렵채집민이 야영지를 옮기는 이유는 특정 지역의 식량 공급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는 계절에 맞춰 다양한 식량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강 옆에 정착할 경우에는 식량이 저절로 찾아오기 때문에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 식물은 고정되어있고 어류는 그렇지 않다
  • 정주가 항상 농사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착한 수렵채집민 집단 가운데 일부는 현대에 들어설 때까지 농업을 채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주가 농사로 전환할 가능성을 더 높여준 것은 사실이다.
  • 가량 야생 곡물을 수집했던 수렵채집민의 경우, 정착한 이후 식량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씨앗을  뿌리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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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물을 가공하기 위해서는 맷돌이 있어야 했는데, 맷돌은 너무 무거워서 수렵채집민이 이 야영지에서 저 야영지로 들고 다니니가 불펴했다. 그러다 정주가 더 늘어나면서 곡물은 이전보다 더 매력적인 식료품이 되었을 것이다. 맷돌의 혁명성?
  • 곡물은 처음에는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식량이었다가, 점차 더 중요한 식량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 정주의 결과로 인구가 늘어난 것 역시 인류가 농사를 짓게된 요인 중 하나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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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일부 지역에서 수렵채집민이 선호하던 대형 사냥감의 숫자가 줄어든 것이 농사로 돌아서게 된 이유일 수도 있다. 또 사회적 경쟁이 농사가 촉진된 원인일 수도 있다.
  • 어쩌면 종교적인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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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째서 농업은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전파된 것일까? 한 가지 가설은 농민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즉, 농민이 가는 곳마다 수렵채집민을 대체하거나 말살시켰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가설은 농사 지역 주변에 살던 수렵채집민이 덩달아 농민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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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민이 전파되었다는 생각
  • 세계 여러 지역에서 나온 증거로 뒷받침된다. 농민이 경적되지 않은 땅에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출발하면서, 그 결과로 길들이기가 처음 일어난 지역에 집중된 ‘전진의 파도'가 일어났다.
  • 농업의 본고자에서 시작된 이주라는 발상은 언어적 증거로도 뒷받침된다. 농사의 관습과 함께 언어도 전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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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 몇 군데 유적에서 나온 고고학적 증거에서도 농민과 수렵채집민이 나란히 어울려 살면서 물품을 교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수렵채집민이 농민 근처에서 살아가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농사로 얻은 식량에 언제라도 의존할 수 있었던 농민은 정착지 인근의 야생 식량 출처를 소진시키기 일쑤였다.
  • 아나톨리아 반도(터키 서부)에 사는 사람들이 최초 농민의 대표자로 간주되는 것이 일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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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2000년에 이르러 인류의 대부분은 농사를 채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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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최초의 문명을 부양했던 세 가지 식량은 오늘날에도 인류 생존의 기반을 이룬다. 즉 밀과 쌀과 옥수수
  • 오렌지색 당근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본래 당근은 흰색 아니면 보라색이었다.
  • 오렌지색 당근은 네덜란드 원예학자들이 오라녜(오렌지) 공 빌렘 1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
  • (동물도) 대부분 기원전 2000년경에 이미 길들이기가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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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중에 추가된 종류는 극소수
  • 오늘날 우리가 의존하는 14조의 대형 동물 가운데 최근 100년 사이에 길들여진 것은 순록 하나뿐이다.
  •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블루베리, 딸기, 크랜베리, 키위, 마카다미아 너트, 피칸, 캐슈 등은 모두 비교적 최근에 길들여진 것이지만, 이 중 정말 중요한 식료품은 하나도 없다.
  • 지난 한 세기 동안 상당량이 길들여진 것은 오직 수산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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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르크의 표준 직업 목록
  • 기원전 3200년 경
  • 이 지역은 세계 최초의 문자와 도시가 생겨난 곳
  • 이 목록에는 129종의 직업
  • 맨 위에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직업으로 간주
  • 대법관, 시장, 현자, 조신, 사자, 감독관
  • 이 목록은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을 우르크의 인구가 여러 가지 전문 직업에 따라 계층화되어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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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고 평등한 마을들이 크고 계층화된 도시들로 전환된 것은 농업의 집중화 때문이었다. 
  • 생산된 잉여 식량은 다른 사람을 부양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고, 결국 농민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 우루크에서 농민은 전체 인구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들은 도시를 둘러싼 반경 16킬로미터 정도의 농지를 돌보았다. 
  • 농업의 채택으로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농업의 집중화로 부자와 빈자, 지배자와 농민으로 나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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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세계에서 식량은 곧 부였으며, 식량의 지배는 곧 권력이었다. 
  • 농업의 채택, 식량 생산에서의 변화, 그리고 이에 수반된 사회구조의 변화는 모두 동시적으로 일어났으며 서로 뒤얽혀 있었다. 
  •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단순한 마을에서 복잡한 도시로 이행하는 데 무려 5000년이나 걸렸으며, 중국과 아메리카에서도 수천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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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의 수렵채집민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규범에 따르면, 용케 식량을 구해서 야영지로 돌아온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말고 식량을 나눠주어야 한다. 이 규범은 식량 부족에 대응하는 일종의 보험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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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량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수렵채집민 사회의 구조를 결정한다. 수렵채집민 집단의 크기는 야영지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 이내에 존재하는 식량 자원의 가용성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너무 큰 집단은 인근 지역의 식량 자원을 빨리 소진시키게 마련이므로 야영지를 더 자주 옮겨야 하고, 결국 더 넓은 영토를 필요로 하게 된다. 그 결과 수렵채집민 집단의 크기는 식량이 희귀한 지역에서는 대략 6~12명이며, 자원이 더 풍부한 지역에서는 25~50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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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대부분 주민이 기껏해야 100명 이내인 최초의 마을에서는 오두막이나 주택이 유사한 형태와 크기로 지어졌다. —> 정착한 후 꾸린 무리=마을
  • 더 이상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되자, 잉여 식량과 물품을 축적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사회적 분화의 최초 증거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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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도시에서는 지배 엘리트가 잉여 농산물을 몰수해서 사용하고, 그 나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처럼 강력한 지도자는 어떻게 생겨난 것이며, 이들은 어떻게 해서 농업잉여분을 장악하게 되었을까? 
  • 평등주의 마을에서 계층화된 도시로 가는 길에 중요한 한 걸음은 아마도 ‘거물’의 등장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들은 잉여 식량과 물품의 흐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했고, 그 덕분에 여러 사람의 하수인이나 추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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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물이 이용한 설득수단은 
  •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그는 이들에게 빚을 안겨준 셈
  • 이들은 장차 더욱 호탕한 선물을 가지고 되갚아야 할 것
  • 일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거물이 우선 자기 가족을 설득해 잉여 식량을 생산하고, 그 잉여 식량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어야 했다. 그 대가로 거물은 더 많은 식량을 돌려받았고, 그렇게 받은 식량을 이번에는 자기 가족이나 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더 많은 의무를 부과했다. 
  • 이런 과정을 통해
  • 거물이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노력함에 따라 큰 잔치가 벌어지게 된다. 그는 기존의 사교 범위 바깥에 있던 사람들까지 초대하고, 심지어 다른 마을 사람도 초대해서, 그들에게 빚을 떠안기는 동시에 그들을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거물은 스스로를 공동체에서 영향력있고 힘있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TV프로그램 지니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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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물은 잉여 식량과 물품의 교환소 기능을 했으며, 그 분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했다. 어떤 가족이 여분의 식량을 생산했을 경우, 이들은 나중에 어떤 도구를 바꿔야 할 때나 식량이 부족할 때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그 잉여분을 거물에게 제공했다. 거물로 성공할 경우에는 그 공동체의 경제를 통합하고 조정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그 공동체의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추종자를 강제할 힘까지 지니지는 않았다. 
  • 거물은 왕보다 경영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리라
  • 거물은 어떻게 마을이나 족장 사회의 강력한 족장이 되고 급기야 지배 엘리트의 맨꼭대기에 선 왕이 되었던 걸까?
  • 여러 가지 이론이 경합
  • 더 정교한 사회조직이 생기면서 더 높은 농업 생산성이 가능해졌고, 더 많은 식량 잉여분이 생기면서 더 정교한 사회조직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애초에 어떻게 시작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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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이론에서는 거물 또는 지도자가 농업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더 강력해졌다고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농업 활동은 바로 관개였다. 
  • 공동체 구성원 입장에서는 일단 관개시설의 건설에 나름대로 투자하고 그 시설에 점차 의존하게 된 다음부터는 그곳을 떠날 의향이 줄어들었다. 결국 관개시설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권력을 지니게 되었으니, 여차해서 지도자의 눈 밖에 나는 사람은 물을 조금밖에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처음에는 공동체의 농사 계획으로 시작했던 관개시설이 지도자의 권력을 크게 증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
  • 하지만 관개에 의존한 일부 족장사회는 더 복잡하고 뚜렷한 계층화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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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다른 이론
  • 농업 잉여분의 공동 저장 덕분에 지도자가 추종자에게 더 큰 통제력을 수립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 거물은 곡물 창고를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곡물 창고를 세우고 그 안에 곡물을 보관하게 되자, 거물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유동자산’을 보유한 셈이 되었다. 거물은 식량잉여분을 이용하여 전업 공예 전문가를 고용하고 농업 노동을 조직했는데 이런 투자가 결국 곡물 창고에 넣어둘 수 있는 곡물의 형태로 긍정적인 대가를 낳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 정교한 공공 토목공사 계획이 점차 많이 생겨나면서 지도자의 지위를 합법화해주었으며, 행정관도 더 많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이 지배 엘리트로 대두하게 되었다. 
  • 기원전 6000년경 근동에서는 마을마다 거대한 중앙 건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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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번째 주장
  • 농지를 둘러싼 경쟁이 그 농지의 인접 지역에 있던 여러 공동체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것
  • 농민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을 것이다. 농사에  쓸 수 있는 땅이 모두 사용되고 나면, 농민은 생산을 증강했을 것이다. 
  • 하지만 결국 이들도 농업 생산성의 한계에 도달해, 마을들은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한 마을이 다른 마을에 승리를 거두면 패배한 마을의 농지를 몰수하거나 패배한 마을의 매년 수확량 중에서 일정 부분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 지역에서 가장 강한 마을은 지배계급으로 대두한 반면, 더 약한 마을들은 잉여 생산물을 지배계급에게 넘겨주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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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하여 부자를 위해 빈자가 농사를 짓는 체계가 수립된 것이다. 
  • 문제는 계층화된 사회가 처음 대두한 곳 어디에서도 농업 생산성이 한계로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 이런 모든 이론을 포괄하는 좀 더 일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더 복잡한 사회는 생산성도 높고, 유연성도 더 높고, ㅓㅇ려움을 이기고 생존할 능력도 더 높고,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도 더 뛰어날 것이다. 강력한 지도자가 대두한 마을은 인근의 덜 조직화된 마을과 경쟁해서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고, 적어도 지도자의 권위에 기꺼이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살기 좋은 장소가 되었을 것이다. 
  • 애초에 사람들은 잉여 생산물 가운데 일부나 전부를 지도자에게 건네주는 행위를 충분히 지불할 만한 비용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머지않아 지도자는 식량의 잉여분 가운데 자기 몫을 점점 더 많이 차지하는 지위로 변했을 것이다. 일단 한곳에 정착하고, 노동력을 투자해 주택과 농지와 관개시설을 마련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그곳에 계속 머물러야 할 이유가 생긴다. 비록 그곳의 지도자가 점점 더 위세를 부리고, 심지어 자기가 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말이다. —> 권력이 생기는 이유는 ‘정착’해야하기 때문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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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도시가, 그리고 지역에 따라 조직된 전문적인 장인들과 사원과 피라미드 같은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나타났을 무렵에 사회적 계층화가 생겨났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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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업 잉여물 가운데 일부나 전부를 누군가에게 넘겨줘야 한다는 원칙은 초기 문명 모두에게 공통적이었다. 왜냐하면 잉여물의 전유야말로 애초에 문명의 대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계획이 있다. 
  •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세금이 식량이라는 직접적인 방식이나 농업 노동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납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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