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따라가기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답지 않겠는가.'

'人'은 타인을 의미하는 명사입니다.   일반적으로 남을 표현할 때 쓰이며 자신을 표현할 때는 '己'를 씁니다.
 
君子는 '군자답다'라는 형용사로 이해해야 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세 구절이 모두 댓구를 이루고 있으며 '不亦--乎'로 끝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공부했던, 說, 樂, 君子는 동일한 성질입니다.
 
이 첫 장은 공자 말년에 언급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사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 '...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라' (칠십이종심소용하야 불유구라) ;
" 내 나이 칠십, 마음이 가는 데로 따라가도 위배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그의 삶을 돌아보면 결코 자연스럽지만 않았고 끊임없는 기대와 집착 속에 있었습니다.
멀게는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주공과 가깝게는 춘추시대의 패왕의 자리를 만든 제나라의 관중이 그에게는 모델이자, 콤플렉스의 대상이었는지 모릅니다.
심지어는 공자 스스로 자신의 신념조차도 흔들릴 위험한 유혹 속에 놓여 있기도 하였습니다.
노나라에서는 공산불유의 반란에 참여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제자들이 반대하자 "그들이 나를 초대했으니 이는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내린 것이다. 만일 누군가 나를 기용하려 한다면, 나는 동방에서 주대의 사회제도를 부흥시킬 것이니라"고 변명합니다.  더 나아가 진나라에서는 조간자의 가신인 필힐이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끌어들이려 할 때 그에 응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자로와의 대화 속에서 그의 '명'이 실현되지 못하는 절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행위가 올바르지 않은 인간은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필힐이 반역행위를 하는데 그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시니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래 그렇게 말했지, 그러나 너는 모르느냐?  진실로 강한 물건은 어떻게 갈아내려고 해도 얇아지지 않고 진실로 결백한 물건은 어떻게 더럽히려고 해도 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욕망과 가치 사이의 길항 (갈등), 이르자면 '하고 싶음'과 '해야 하는' 것 사이에 길항이 있었고, 그 어느 하나도 쉽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14년 간의 주유과정은 이 길항의 간극을 좁히고 조절하고 성찰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첫 장은 공자 전생애에 걸친 통찰이 녹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바라본 '學'의 의미에 있어서 거대한 전환을 의미합니다.
진정 '먼 곳'( 遠方)에 대한 의미일 것입니다.
당시에 모든 교육은 귀족계급을 중심으로 그들의 입신출세를 위한 수단적 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자에게 그 교육은 이제 '먼 곳' 즉 안회와 같은 가난한 서인들이나 자로와 같은 야인 출신들을 끌어안는 것이어야 하며 그 내용은 '기능'을 넘어서 미래적 '가치'를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學'의 의미는 단순히 입신양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수양과 '때에 맞춰서 실천'하는 윤리학이자 그에 기반한 정치학인 것입니다.
 
** 나에게 던지는 질문..
나는... 왜, 무엇을 위해 學하는가 ?
내가 가치롭게 여기는 것이 내가 배우는 것으로부터 어떻게 태어나는가 ?
 
가치를 확인하고 지키기 위해서도 배워야 하고,
반대로 배움을 통해서 새롭게 가치를 발견해낼 수도 있는 것은 아닌지..
따라서 배움은 그 자체로 생애 전 과정을 통해 내가 동행할 벗이요 내가 더불어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될 벗이 되는..
이미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군자됨의 길'을 걷고 있으니 다른 이의 시선과 평가와 인정이 무에 그리 의미있을쏘냐 !
 
배움을 통해 스스로 기뻐할 줄 알고,
뜻을 함께 하는 이들과 만나 함께 배움을 교류하면..
이로써 진정 '배움'의 의미를 아는 자라 할 수 있으니 그가 바로 '군자'라 불릴 만하지 않겠습니까?^^
 
내 안에 꽉 채워진 것이 무엇인지 들여다 볼까요 ?
'나'의 소욕인지, 아니면 다른 이가 드나들 수 있는 한가로운 터인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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